Page 51 - 2021년 4월 라이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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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꾸러기에서 봄철 별미로 신분 급상승!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문어 새끼’, ‘숏다리 낙지’라고 불리
며 미움을 받던 내가 이렇게 추대받는 날이 오다니 실로 감
개무량하다. 사실 나는 문어과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겨
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서해안 어촌 사람들이나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런 존재였단 말이다.
문어 할아버지는 제사상에 오를 만큼 극진한 대접을 받았
고, 낙지 오빠는 최상의 해산물로 미식가들 사이에서 명성 히는 것은 물론
이 자자했다. 이름만 해도 그렇다. 문어(文魚) 할아버지는 이요, 주꾸미 맛의 결
함자에 ‘글월 문(文)’ 자를 써서 ‘글을 아는 물고기’라며 예 정체라고 할 수 있는 머릿
로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는데, 내 이름은 슬 속(실은 몸통이다)의 알 맛 역시 이맘때가 절정이다. 비싸
프게도 ‘주꾸미’다.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나약한 모습을 고 맛있다고 소문난 낙지 오빠도 봄철만큼은 나의 적수가
상상하게 되는 아주 볼품없는 이름이지 않은가! 하지만 정 되지 못한다. 오죽하면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는 말이
약전이 저술한 <자산어보>에는 나를 ‘죽금어’라 이르며 한 다 있을까. 그렇다. 이제 나는 예전에 천대받던 그 주꾸미
자로는 ‘웅크릴 준(竣)’ 자를 써 ‘준어(竣魚)’라 했는데, 이는 가 아니다. 봄철만큼은 바야흐로 나, 주꾸미의 세상인 것
내가 한낮에 바위틈이나 소라 껍데기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이다!
모습을 본떠 지은 이름이라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 몸통에 알이 가득, 깨물면 오도독! 구수한 맛이 일품
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사람들이 국토개발이라는 명목 내 인기가 이렇게 높아지다 보니 요리법도 다양해졌다. 예
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바람에 깨끗하던 서해 연안 갯벌이 전에는 기껏해야 끓는 물에 데쳐 초고추장이나 찍어 먹더
오염되기 시작했다.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던 낙지 오빠들 니 요즘에는 회는 물론 샤부샤부, 볶음, 무침, 샐러드 등
은 오염된 갯벌을 견디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 다양한 요리법으로 즐긴다. 바닷가 사람들은 익혀 먹는 것
러지 않아도 비싸던 낙지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 보다는 산 주꾸미를 그대로 초장에 찍어 먹는 것이 가장 맛
작했고, 사람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가격이 저렴한 주꾸 있다고 하지만, 사실 주꾸미 하면 샤부샤부와 볶음 아니겠
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전에 는가.
는 나를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의 평가가 샤부샤부는 육수가 맛을 좌우한다. 육수를 먹어봤을 때 다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낙지 오빠에 비해 쫄깃한 맛이 나 소 밍밍하다고 느낄 정도로 간을 해야 주꾸미 본연의 맛을
지 않는다고 구박하던 사람들이 내 육질이 부드럽다고 칭 즐길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된장을 연하게 풀어 감칠맛을
찬하는가 하면, 짧고 못생긴 내 다리도 귀엽다고 어쩔 줄 돋우기도 하지만, 맹물에 대파·고추 등 최소한의 재료만
몰라 한다.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이 얼떨떨하긴 하지만 사 넣고 끓이는 것이 바로 맛의 포인트.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람들의 이런 칭찬이 솔직히 싫진 않다. 주꾸미를 넣는데, 이때 다리는 살짝 데쳐야 질기지 않고 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봄철에 나만한 별미도 없다. 드럽다. 고추냉이를 넣은 간장이나 새콤한 초고추장에 찍
특히 산란기를 앞둔 3~4월에 주꾸미는 최고의 맛을 자랑 어 먹으면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육질이 혀를 무한 감동
한다. 살이 통통하게 올라 다리의 육질이 감칠맛 나게 씹 시킨다. 출처 <뉴트리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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