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2021년 2월 라이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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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지혜가 담긴 먹거리
부럼이라는 말에는 ‘굳은 껍질의 과일’을 총칭하는 뜻 외에
부스럼의 다른 말인 ‘종기’라는 뜻이 있다. <동국세시기>에
서는 부럼을 한자로 작절(嚼癤)이라고 썼는데, 부스럼을
깨물어 터뜨린다는 뜻이다.
또 <열양세시기>에는 부럼을 깨는 견과류를 교창과(咬瘡
果), 즉 부스럼을 깨무는 과일이라고 썼다. <담정유고>에서 먹으면 좋고, 밤에는 겨울철에 부족해지기 쉬운 비타민 C
는 “호두와 밤을 깨무는 것은 바가지를 깨는 것처럼 종기의 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 잣은 열량이 높지만 자양 강장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숴버리는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어 겨울철 기운을 북돋우는 데
왜 하필 부럼을 먹으면 부스럼이 없어진다고 믿었는지 확 도움을 준다.
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부스럼을 부럼이라고도 하
는 만큼, 언어질병적(言語疾病的) 속신이 작용했을 것이 옛날에는 땅콩 부럼이 없었다?
라는 견해가 있다. 비슷한 예로 정월 대보름의 또 다른 세 대보름 부럼으로 가장 흔히 먹는 견과류는 땅콩이다. 그러
시 풍속인 다리밟기가 있다. 정월 대보름 밤에 다리를 밟으 나 1849년 <동국세시기>에서는 부럼으로 땅콩을 언급하지
면 다리병을 앓지 않는다는 놀이인데, 다리(脚)와 다리(橋) 않는다. 밤, 호두, 은행, 잣, 심지어 무를 깨물어 먹었다는
의 발음이 같은 데서 생긴 관습이다. 기록은 있지만 땅콩은 찾아보기 어렵다. 부럼에 땅콩이 포
어쨌든 부럼은 영양 섭취 면에서 훌륭한 풍습이다. 먹거리 함된 기록은 20세기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6년 최
가 풍족하지 않던 과거에는 남녀노소 모두 영양을 충분히 남선이 집필한 <조선상식>에서는 “대보름 새벽에 밤, 호
섭취하지 못해 피부에 부스럼이나 종기가 나는 경우가 흔 두, 은행, 잣, 무 등을 깨물지만, 최근에는 무 대신 낙화생
했다. 특히 겨울철에는 대기 습도가 여름철의 절반 수준으 (落花生), 즉 땅콩을 많이 먹는다”고 적었다.
로 떨어지니, 피부 수분을 빼앗겨 각질이 일어나는 등 피부 우리 전통 견과류처럼 여기고 있지만, 땅콩의 원산지는 남
질환이 심해지기 쉽다. 반면 먹거리는 부족하고 신선한 채 미다. 우리 조상이 중국을 통해 땅콩을 접한 것은 지금으로
소도 구하기 어려웠는데, 이때 필수지방산과 비타민이 풍 부터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다. 1778년 사신으로 청나라
부한 견과류를 먹는 건 영양 면에서도 좋은 선택이다. 에 다녀온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 “꽃이 땅에 떨어져 흙
부럼으로 먹는 견과류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불포화지방산 에 묻히면 그 속에서 열매를 맺는 특이한 과실”이라고 적
은 겨우내 수축되고 손상된 피부를 기름지고 부드럽게 만 었다. 1799년 중국을 다녀온 서유문도 <무오연행록>에서
드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호두와 잣, 땅콩은 단백질, 식 “꽃이 모래 속에 떨어지면 스스로 열매를 맺는데 맛은 호
이섬유, 비타민 B·E·C 등의 풍부한 영양소를 함유해 피부 두와 같다”며 기이한 열매라고 기록했다. 땅콩은 꽃이 수정
각질을 가라앉히고 가려움을 완화해준다. 된 뒤 씨방자루가 밑으로 길게 자라 땅속으로 들어가 열매
그 밖에도 겨울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소가 풍 를 맺는데, 조선 실학자 눈에 매우 신기하게 비친 것이다.
부하다. 겨울이 되면 심혈관 질환이 악화되기 마련인데,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땅콩을 재배한 것은 훨씬 뒤인 것으
호두에 들어 있는 필수지방산은 혈관 벽에 콜레스테롤이 로 보인다. 이덕무가 땅콩 종자를 심었는데 썩어서 싹이 나
부착되는 것을 막아주어 심장 질환을 예방하는 데 좋다. 은 지 않았으며, 한참 뒤인 1836년 남모라는 사람이 집에 땅
행은 폐를 튼튼하게 해주므로 가래나 기침이 잦은 사람이 콩을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출처 <뉴트리앤>
february 2021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