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2024년6월 라이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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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주목하는 식재료 흙투성이에 못생긴 ‘악마의 열매’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콜럼버스 탄생 500주년 기념관 대항해 시대로 알려진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고문이던 헨리 홉하우스는 <역사를 바꾼 5가지 씨앗>이라 많은 사람이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신대륙으로 떠
는 책에서 키니네(말라리아 치료제), 목화, 차, 사탕수수와 났다. 그리고 페루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원주민의 식량인
함께 감자를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5대 씨앗’이라고 언급 감자를 접했다. 페드로 시에자 데 레온이 쓴 <페루 연대기>
했다. 또 미국을 대표하는 시사 사진 잡지 <라이프>는 각 에는 “감자는 견과류의 일종으로 삶으면 밤처럼 부드러워
계 전문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역사에 영향을 끼친 100가 진다. 껍질은 트뤼프보다 담백하다”며 감자를 설명하고 있
지 사건’을 선정할 때 39번째로 ‘감자 재배’를 넣었다. 다. 이후 감자는 유럽에 전해졌다. 당시 유럽은 인구 증가
감자는 어떻게 해서 이렇듯 중요한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 로 식량이 부족한 시기였던 만큼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
찰스 다윈의 발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6개월 고 영양을 균형 있게 갖춘 감자가 식량으로 제격이었으나,
이상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 칠레의 메마른 산, 그리 유럽인의 생각은 달랐다. 땅속에서 자라고, 흙이 묻어 있
고 남부 지역 섬의 습도 높은 숲에서 똑같은 작물이 자라는 으며, 거무스름한 색깔에, 모양이 울퉁불퉁한 감자는 남미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의 가난하고 미개한 원주민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여긴 것
즉 어떠한 조건에서도 재배할 수 있어 세계 각지에서 감자 이다. 심지어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의 혜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전문가는 감자의 원 ‘악마의 열매’라는 별명이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1573년
산지를 페루 남부의 안데스 고산지대라고 추정한다. 페루 스페인 세비야의 한 병원에서 감자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
와 볼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남미 최대의 담수호인 티티카 긴 하지만, 감자 식용과 관련한 다른 이야기를 찾기는 어렵
카호 주변에서 기원전 400년경 감자를 재배한 흔적을 발 다. 고작해야 전쟁에 나간 스페인 용병이 말에게 감자를 먹
견했기 때문. 이런 감자를 지금은 러시아, 중국, 인도, 아 이다가 배가 고프면 자신도 먹었다는 정도다.
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도 재배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어디서 오늘날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감자 재배 규모가 큰 러시아
든 생산 가능한 식량인 것이다. 도 당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7세기 말 표트르 1세는 선
하지만 전 세계인이 처음부터 감자를 유용한 작물로 여긴
건 아니었다. ‘악마의 열매’라는 별명이 붙은 바람에 유럽
각국의 왕실과 정부에서 아무리 감자 재배를 권장해도 농
민은 목숨 걸고 감자 재배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감자는
지금처럼 중요한 식량 자원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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